키보드엔 관심이 많았지만, 실제로 본격적으로 구매의 마성에 빠진 것은 올해부터였습니다.


펜덕후 친구가 중고(로운 평화)나라를 자주 쓰길래 들어갔다가 한글 각인 IBM Model M을 발견하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키보드의 마성에 빠지기 시작했고, 얼마 전에 '꿈의 키보드'를 구하여 드디어 콜렉션(?)을 완성했습니다.


사실 처음 구한 기계식 키보드는 아이락스 KR-6251 적축, 처음 구한 무접점 키보드는 한성컴퓨터 62G였지만 전자는 친구에게 양도, 후자는 중고 방출로 새 생명을 주었습니다. 이 친구들은 좋은 주인들 만나서 마음껏 키감을 뽐낼 것이라 생각합니다.


현 시점에선 총 5대의 키보드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키보드들은 모두 올해에 샀는데, 결산의 의미로 키보드매니아의 자리를 빌어 정리해 봅니다.


공통적 특징으론 모두 한글 각인 키보드입니다. 또한 기계식 키보드는 모두 리니어 축이고, LED 스위치를 쓰며, ABS 더블샷에 검은색 키캡입니다. 반면 기계식이 아닌 키보드는 LED가 없고, PBT 승화에 베이지/그레이 키캡입니다.


1. IBM Model M (93.03.18 생산, 1396790 UK 생산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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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6월 초 중고거래로 구한 키보드입니다. 예전엔 '유니콤프 키보드도 그림의 떡인데 내가 모델 M을 쓸 수 있을까' 식으로 구할 수 없는 키보드라고 생각했는데, 친구 소개 덕에 알게 된 중고나라에서 한글 각인이 된 물건을 발견했습니다. 어찌나 기뻤는지 당시 회원 가입도 안 된 상태에서 친구 중개로 판매자와 연락이 닿았고, 다행히 구매에 성공했습니다.


중고나라 첫 구매 물품이 된 이 키보드는 공교롭게도 저와 생일이 거의 비슷한 물건이었습니다. 첫 인상은 매우 무겁고 거칠었지만, 쓰면 쓸수록 든든하고 듬직한 매력에 빠져들었습니다. 특히 스프링이 꺾이면서 바닥을 치는 '똑부러지는' 키감은 그 어느 키보드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체리 청축, 알프스 백축과는 그야말로 차원이 달랐습니다.


이 때부터 타건 매장이나 PC방에선 어느 키보드를 잡아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단단하지만 섬세한 키감, 태닝 걱정도 없어 보이는 최고급 하우징, 90년대~2000년대 초반의 컴퓨터를 보는 듯한 감성 넘치는 한글 각인, 심지어는 스탭스 1 적용 덕에 상부에 생긴 볼펜을 올릴 수 있는 공간까지... 모든 것이 제 손에 그대로 녹아들었습니다.


다른 키보드는 21세기에 생산되었지만, 이 키보드는 제 동갑내기입니다. 앞으로 키보드 인생에서 이 키보드는 저와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는 친구가 될 것입니다.


2. Skydigital BT61 (Kailh Red, 17.7 초순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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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초순 경 구매한 미니 키보드입니다. 저는 교회에 다니면서 설교를 아이패드에 적습니다. 예전엔 아이패드의 터치 키보드로 적었는데, 케이스를 바꾼 후 손가락도 불편하고 버그도 생기고 해서 슬슬 한계가 보였습니다.


그러던 찰나 스카이디지탈에서 60% BT 키보드를 판매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이거다!' 싶어서 구매하기로 했습니다. 때마침 스카이디지탈에서 나온 키보드 가방과 함께 할인 판매를 진행한다고 하여 바로 구매했습니다.


(정작 스카이디지탈 가방은 지금 장롱 어딘가에 모셔져 있습니다. 모델 M이 하도 커서...)


이후 설교를 적을 때 이 키보드를 쓰고 있습니다. 예전에 썼던 체리 적축은 너무 가벼워서 도저히 적응을 못 했는데, 카일 적축은 압력이 적당히 가벼워서 아주 편하게 입력이 가능하더군요. 적축을 썼다고 구름타법도 어느 정도 익힌 덕에, 설교도 구름타법의 키감을 즐기며 빠르고 정확히 옮겨적을 수 있습니다.


(교회 모임에서 이 키보드를 꺼냈는데, 전 모델 M에 길들여져서 몰랐는데 다들 무겁다고들 하시더군요. 기계식, 무접점 BT도 아직 마니아의 영역이다 보니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 키보드는 앞으로 아이패드 전용 키보드로 쓸 생각입니다. 아이패드 유리를 두들기던 것에서 훨씬 편안하고 든든한 키감을 선사받았으니, 설교를 적을 때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3. Ducky SHINE 5(Cherry MX NatureWhite, 17.09.05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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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작업용으로 쓰던 아이락스 KR-6251 적축을 친구에게 주고 구한 키보드입니다. 기존 키보드는 106키에 적축이라는 점 때문에 어느새 104키에 길들여진 제 손에 어느덧 안 맞는 물건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작업 특성상 리니어 키보드가 필요했고, 중고나라에서 매복한 끝에 이 물건을 봤습니다. 구매 과정에서 다소 꼬인 탓에 중고로운 평화나라 사단이 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무사히 배송받았고 제품 상태도 거의 완벽했습니다.


뉴백축... 적축과 흑축의 사이라고 들었는데 사실 감이 잘 안 잡혔습니다. 타건할 기회도 없었고... 하지만 특정 키를 계속 누르며 작업을 해야 하는 제 일 특성상 리니어 스위치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그 와중에 뉴백축 스위치를 이번에 처음 쓰게 되었고, 그 느낌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일을 하면서 구름타법 수준으로 스위치를 누르는 감을 잡았고, 그 이후 카일 적축으로 구름타법을 구사했습니다. 하지만 카일 적축도 너무 가볍다 싶을 때가 있었는데, 뉴백축은 구름타법에 딱 맞는 수준으로 힘을 요구했습니다. 덕분에 다른 키보드를 쓰다가도 잠시만 적응하면 아주 정숙한 구름타법이 가능합니다.


이 키보드는 업무를 볼 때 쓰거나, 모델 M의 강력한 키압에 지쳤을 때 손을 달래주는 용도로 쓰고 있습니다. 제아무리 모델 M이 최고의 키보드라지만 억센 건 어쩔 수가 없더군요. 나름 희소성 있는 체리 뉴백축이기도 하고, 일단 체리 MX라는 점에서 신뢰가 갑니다.


4. MAXTILL TRON G610K(OUTEMU Black, 17.11.18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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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키보드는 다른 것들에 비해 충동구매를 한 물건입니다. 지스타 2017에 갔는데, 맥스틸에서 제법 큰 부스를 냈더군요. 주력 제품이 오테뮤 축을 사용하고 있는데, 개중에 저는 리니어축 마니아로서 흑축이 당겼습니다. 부스에서 타건했을 때 흑축의 쫄깃한 느낌이 와닿았고, 비키 스타일이라는 특이한 점도 끌렸습니다. 여기에 하우징을 장착해서 스탠다드 형태로도 사용할 수 있는 점에 한 번 더 끌려,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지스타에서 이걸 갖고 오느라 낑낑댄 건 안 비밀...)


실제로 타건한 소감은 체리 뉴백축보다 약간 무거웠습니다. 다만 서걱임도 은근히 많이 느껴졌고, 비키 타입의 특징도 딱히 느끼진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샤인 5와 포지션이 겹쳐서, 지금 사용하는 빈도가 높지 않습니다. 제가 길들이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오테뮤 흑축의 인상이 다소 아쉽긴 합니다.


다른 키보드와 달리 이 키보드는 방출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키보드를 배우면 수업료를 지불하게 된다고 하는데, 이 키보드가 그 수업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오테뮤 흑축은 아쉬운 면이 있었습니다만, 흑축에 대해 배우고 나아가 요즘 키보드 문화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5. Realforce 104UK-Hipro(Topre Switch, 17.12.09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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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마지막으로 구매한 키보드이자,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노리던 키보드입니다. 처음 용산의 타건매장에 갔을 때 리얼포스를 타건했는데, 다른 건 별 느낌이 없고 그냥 '부드럽다' 정도였지만 이 하이프로만큼은 손에 확 감겼습니다. 키보드가 손을 빨아들인다고나 할까요? 타건하면 할수록 더 타이핑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엔 높은 가격에, 그 때만 해도 '난 못 구할 거야 아마'라는 생각이 커서 그냥 매장을 나왔습니다.


하이프로는 취향을 상당히 타고, 타건도 충분히 하고 결정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타건을 해 봐도, 하이프로 특유의 키감과 레트로한 디자인은 도무지 잊히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대선배 모델 M을 샀어도 하이프로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운 좋게도 적절한 가격에 이 키보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타건하고 느낀 것은 제가 처음 만났을 때 느낀 그 키감과 같았습니다. 오목한 키캡이 제 손가락을 부드럽게 감싸주었고, 가벼우면서도 구분감이 확실한 토프레 스위치는 마치 악기를 연주하는 듯한 키감을 선사했습니다. 리얼포스지만 리얼포스와는 다른, 하이프로만의 매우 뛰어난 키감이 살아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은 IBM 모델 M과 리얼포스 하이프로를 번갈아가며 쓰고 있습니다. 다른 키보드들은 몇 번 시타한 후 치우는데, 이 하이프로는 도저히 못 치우겠더군요. 모델 M이 무거우면 하이프로로, 하이프로가 심심하면 모델 M으로... 다양한 키보드의 맛을 이 한 자리에서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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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제 키보드 철학을 나타내는 사진입니다. '방금 샀어도 10년 된 듯한 키보드, 10년 됐어도 방금 산 듯한 키보드'를 모았습니다. 수많은 키보드들이 있지만, 역시 세월을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명품'이 최고라고 느낍니다.


제게 2017년은 '키보드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친구 모델 M, 감사의 키보드 BT61, 든든한 체리 SHINE 5, 오테뮤의 스승 G610K, 꿈의 키보드 하이프로... 많은 키보드와 만났습니다. 앞으로 이 키보드들과 어떤 길을 갈진 모르겠지만, 올해만큼은 즐거운 한 해였습니다.


P.S 아이폰으로 찍은 사진을 컴으로 옮기려고 했는데 네이버 클라우드고 앱이고 프로그램이고 죄다 방법이 막혀버려서 결국 카톡으로 보냈습니다. 사진 질이 나쁜 것에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이폰이 다른 건 다 좋은데 사진 보내기 까다로운 건 싫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