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시나브로입니다.

타자를 칠 일이 많은 만큼 키보드에도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만, 현재 7년째 쓰고 있는 키보드의 키감에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해 기계식에 도전해 볼까 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품은 채 새 키보드를 구입하기 위해 이것저것 조사를 하던 도중 키보드매니아까지 흘러들어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필연적인 절차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

실은 기계식을 써본 적도 없고, 스위치의 차이에 대해서는 키보드매니아에 오기 전까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데스크탑에 쓰이는 것이 (대체로) 멤브레인, 노트북에 쓰이는 것이 펜타그래프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지요. 그러다 검색을 하던 도중 스카페이스 님의 글을 읽고 수박 겉핥기로나마 차이점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잠깐 기회를 빌어 스카페이스님께 감사드립니다. (역으로 이 험난한 지름과 기변의 수렁에 빠지게 해주신 점을 원망해야 할런지도...)

하지만 역시 글로 읽는 것에는 한계가 있더군요. 러버돔에서 시작해 청축, 갈축, 흑축, 백축, 적축, 알프스 스위치, 후타바, 정전용량... 웬 종류는 그리도 많은지. 보강판의 차이점이나 스프링 개조, 정기적인 윤활 작업 등을 읽을 때 즈음에는 반쯤 정신이 혼미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변환점은 이때 찾아왔습니다. 다른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그곳에 있는 검은색의, 흔히 먹무각이라고 하는 레터링 없는 검은색의 투박하기 짝이 없는 키보드를 쓸 기회가 생겼습니다. 브랜드 로고도 없어서 실은 싸구려 사무용일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만 (...) 다른 자리에 있는 아이보리색의 키보드와 달리 이 녀석만 혼자 모양이 다른 겁니다. 그때쯤에서야 '아, 자기 키보드를 가져온 거로군' 하고 생각하면서 자리에 앉아 손가락을 올려놨습니다.

첫 타를 친 순간 경악.

우와...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심이 둥글둥글한 HB 연필만 쓰다가 처음 금속 재질의 제도 샤프를 만졌을 때의 쇼크라고 해야 할까요. 이게 기계식이구나, 하면서도 제조사명이 적혀있질 않아 끝끝내 어떤 제품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키보드매니아의 개조글을 몇 건 읽고 난 지금은 그게 개인 자작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처음으로 만져본 그 키감에 정말 놀라서 한동안 일은 안하고 이것저것 아무 문장이나 쳐보며 새로운 느낌에 매료되어 있었지요.

제가 현재 집에서 사용하는 키보드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내놓았던 Office Keyboard 입니다. IntelliType 최신 버전을 설치하면 목록에 없어서 다른 모델을 선택해야 하고 (덕분에 키보드 좌측의 스크롤 바나 몇몇 옵션 키는 제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시중에 나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마이크로소프트 홈페이지에서조차 이름이 삭제된 모델입니다만, 어떤 키보드를 살까 하고 오프라인 매장에서 50종 정도 만져본 다음 키감이 가장 마음에 들어 선택한 녀석이었습니다. 물론 스위치 구조는 멤브레인 + 러버돔입니다만... 그나마 가장 낫다 싶더군요. 특수키도 사실 쓸 이유는 없었는데 왼쪽의 스크롤 바가 굉장히 끌리더군요.

실제로도 유용하게 사용했습니다만, 처음 샀을 때는 마음에 들었지만 같은 녀석만 7년째 쓰다 보니 문제가 많습니다. 러버돔 재질에 경화가 일어나서 키감도 문제가 있고, 자주 사용하는 키와 그렇지 않은 키의 키감도 확연히 다른 데다 키캡의 표면이 맨들맨들해져서 손가락 끝에 달라붙는 느낌이... 쩝.

해서 기계식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캐나다에 사는지라 실제로 기계식 키보드만 판매하는 매장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고, 주변에 기계식을 사용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어서 각 스위치별 차이를 느껴볼 기회도 사실은 없습니다. 그래도 제가 원하는 특성이 나름대로 뚜렷한 편인지라 소장 키보드가 두 자릿수가 넘어가시는 분들께 여쭤본다면 어떻게 적당한 후보가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얍삽한 생각으로 글을 남깁니다. (실은 체리사 제품을 일단 구입해볼까 했는데, 공식 홈페이지에서 제품 리스트를 열어봤다가 모델명만 잔뜩 나오는 걸 보고 의기소침해졌습니다... :$)

1. 타자는 가볍게 치는 걸 선호하는 편입니다. 구름타법은 아닙니다만 파워타이핑은 더더욱 아닙니다 (...)
2. 필요 압력량이 너무 큰 건 약간 꺼려집니다만, 너무 얕아도 곤란합니다. 특히 슬림형 노트북 키감은 혐오하는 편.
3. 장시간 타자를 쳐도 손가락이 피곤하지 않은 녀석이면 좋겠습니다.
4. 타자음 자체는 별로 구애받지 않습니다. 단 찰칵거리는 소리가 타자기 수준인 스위치도 있다고 들었는데, 이건 주변 사람을 생각해서 가능한 피하려고 합니다.
5. 키 배열은 표준 레이아웃이 좋습니다. Caps Lock과 Ctrl 키의 위치가 반대라거나, 방향키의 위치가 낮거나 ㅗ 모양이 아닌 한줄로 배열되어 있는 것은 조금 꺼려집니다. 하지만 Insert, Home, PageUp/Down 등의 6키 배열은 달라도 생관없습니다.
6. 키캡 크기는 표준형 혹은 약간 큰 쪽, 각 키 사이가 약간 벌어져 있는 것도 좋습니다. 너무 오밀조밀하면 치기가 힘들어서요.
7. 평소 102/105 (103/106?) 키보드를 사용했습니다만 넘패드를 사용하는 빈도가 적기 때문에 86/87키도 시도할 의향이 있습니다.
8. 키캡의 재질은 꺼끌꺼끌한 쪽이 좋습니다. 매끄럽거나 심지어 약간 끈적이기까지 하는 것은 혐오합니다. (물론 개기름에 절거나 때가 탄 건 아니었습니다)
9. 레터링은 딱히 이중사출이나 레이저가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해외에서 구입할 예정인 데다가 한글 레터링이 있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편입니다만 먹무각의 포스를 실제로 보니 저도 먹무각을 써보고 싶어진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군요. (...)


적어놓고 보니 염치없을 정도로 긴 목록이 되었습니다만, 너무 미워하진 말아주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