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달 쯤 전 레오폴드의 fc200R Lite 로 기계식에 입문하게 된 것이 오늘의 멘붕을 가져오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아시다시피 200R Lite 는 유사알프스 백축을 사용한 키보드이죠.


가진 돈은 얼마 없었고, 기계식은 써보고싶었기에 택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래도 사기 전에 검색은 엄청 해봤습니다. 괜히 어설프면 차라리 돈 더 보태서 제대로 된 걸 살걸.. 이라는 후회가 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쓰는 멤브레인 키보드를 생각하면 5만5천원도 절대 적은 돈이 아니니까요.


역시나 저렴한 제품이다보니 써본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더군요. '나름 키감도 괜찮고 경쾌하나 쇠 울리는 소리가 거슬린다' 정도로 압축할 수 있었습니다. 


타건 영상을 보니 무슨 말인지 이해는 됐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심해보이진 않았고, 저렴한 가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참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결국 질렀고, 막상 써보니 아주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고수 분들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기계식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의 막연한 상상이 그대로 구현된 제품이었거든요.


저압으로 시작된 키 누름이 어느정도 들어간(느낌상 20% 정도) 후에 적당한 반발을 받으면서 구분감이 쫀~득 하고 생긴 후, 끝까지 눌렀을 때 '짤깍' 하는 소리를 들려줍니다.


그러나 이건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한번의 누름을 아주 천천히 했을 때의 소리이고, 실제 고속 타이핑 시에는 손가락에 힘이 더 들어가기 때문에 '타각 다각 타닥 따각 달칵' 하는 느낌의 강한 소리와 '짤깍' 의 소리가 마구 섞입니다.


이른 바 미경험자들이 '기계식' 하면 상상하는(혹시 저만 그런가요;;) 마치 타자기같은 바로 그런 소리죠. 


결국 성공적인 지름으로 귀결되었고, 현재도 잘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얼마후에 생겼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제품의 제일 단점은 키캡 커스텀을 왠만해선 하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알프스 축의 사제(?) 키캡이라고는 컬러 Esc, wasd, 방향키 정도 밖에 없기 때문이죠.  


어쩌다 보니 돈이 조금 생기고, 더 높은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키보드매니아란 사이트에 가입을 했고, 키캡놀이를 하기 위해선 대중적인 스위치인 체리를 쓰는 기성제품이 일단 있어야 했죠.


물론 아직도 12~16 정도 하는 새제품을 뭣도 모르고 덜컥 사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중고시장을 열심히 뒤졌습니다. 싸게 사면 선택의 실패에 대한 리스크가 적기 때문이죠. 


아, 그전에 제일 많이 쓰는 4대 스위치를 '글로만' 익혔습니다. ㅋㅋ


결국 흑축은 뭔가 일반인이 쓰면 안될 것 같은 포스를 무지 풍겨서 제외하고, 청축은 너무 시끄럽다고들 많이 하니 갈축과 적축이 무난하겠다 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일단 무난하게 필코 마제1 적축을 7에 질러놓고 키캡들을 사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일단은 포인트 키캡보단 대륙승화 세트로 한번에 전체 키캡을 바꾸는 식의 커스텀을 하기로 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올 블랙의 키캡의 지겨움이 포인트 키캡 몇개 낀다고 사라지지도 않았고, ABS 와 PBT 의 차이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웃기게도 '배'를 중고시장 뒤져서 7에 산 놈이 '배꼽'은 8~9 짜리를 마구 지릅니다. 대륙승화 닌자, 오렌지, 그레이...


그리고선 구입하기로 한 키캡 셋을 직거래하러 가는 길에 용산에 들러 체리축 키보드들을 실제로 '처음' 타건해 보게 됩니다...




그리곤 곧 멘붕이 시작됐습니다.....;;;;;;;




흑축, 적축, 갈축, 청축.... 어느것 하나 성에 차지않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뭐지??? 이것들이 정녕 기계식 키보드란 말인가...!!!!!' 란 생각이 마구 머릿속에 메아리쳤습니다.

.

.

.


---이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며 다소 과장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흑축은 역시나 말도 안되는 키보드였습니다. 키감?? 그딴 거 없이 그냥 스프링 그 자체일 뿐이더군요.


적축은 흑축의 키압을 줄여 빠른 인식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더니 역시나.. 그저 조금 약한 스프링일 뿐이었습니다.


그나마 '키감' 이란게  존재하는 것이 갈축과 청축이었는데 


갈축은 처음엔 적축과 구분이 어려웠으나 아아~주 약간의 쫀득한 걸림이 있더군요.


그나마 청축이 쫀득한 걸림이 어느정도 있는 수준이었으나 소리가 너무 경박하고 방정맞았습니다.


알프스 백축의 '짤깍 타각' 하는 경쾌한 기계음에 비하면  '째각째각' 거리는 체리 청축의 소리는 마치 작은 새들이 모여서 마구 지저귀는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결국 결론은 갈축에서 구분감이 조금만 더 강하고 소리만 좀 더 크면 좋겠지만 어쨌든 제일 무난한건 갈축이란 결론을 내렸습니다만..



한참 동안 이 키보드 저 키보드를 두드려보며 멘붕을 겪은 뒤에 지금쯤 택배 차에 실려서 제게 오고있을 적축(정확히 말하자면 키압을 줄이는 커스텀을 한 변흑) 마제가 떠올라서 급 서글퍼졌습니다.


아직은 위시리스트에 두기만 했던 그루브87과 더키1087의 중고매물은 그나마 청축이었던 것을 생각하며 위안을 삼습니다.


그래.. 두꺼운 PBT 키캡을 끼우면 키감이나 소리가 얇은 ABS일 때보다 조금은 묵직해진다는 글을 본 거 같아.. 그럴거야.. 아니 그래야만 해..ㅜㅠ  

.

.


그리고선 직거래 약속 시간이 되어 무사히 착하고 인상 좋으신 여성회원 분에게서 대륙승화 셑을 구입하고선 집에 오면서 곰곰히 생각했습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거 일단 이 세계에 발을 들인 만큼 최소한의 키캡 커스텀을 경험해본 뒤, 키감에 적응이 되거나 이쁜 커스텀 키캡의 자태에 마음을 뺏기게 되면 좋은거고, 만약 안된다면 좀 힘들겠지만 알프스 키캡을 구해서 저렴하고 좋은 FC200R Lite를 이쁘게 꾸며주는 걸로 하자..


라고 생각하며, 용산 PC기어에서 사온 4000원짜리 키캡 리무버를 안쓰럽게 처다봅니다...



P.s.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궁금한 건 알프스 축 많이들 써 보셨나요? 이게 제가 보기엔 특성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절대 체리보다 낮은 급의 스위치는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레오폴드에서 제일 저렴한 모델에만 채용하는 바람에 조금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막 입문을 하시는 분들도 대부분 체리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잘 모르시는 분들도 많을 거 같은데 키감 하나는 정말 좋습니다.


소리는 확실히 청축보다 훨씬 더 시끄럽습니다. 사무실 사용은 솔직히 힘들죠. 그런데 그만큼 체리 청축보다 청량감과 무게감이 훨씬 더 업된 소리라 같이 사는 사람이 무신경하거나 자취하시는 분이시라면 정말 써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입문한 지 얼마 안돼서 그런 취향을 갖고있는 거란 생각도 듭니다. 리얼포스 타건해보니 결국 고수들이 가는 종착역은 부드러움과 정숙함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그러니 이 글은 그냥 이렇게 생각하는 뉴비가 있구나.. 정도로 여겨주시길~   





profile

알 이즈 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