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MK에서 ZMK로 — 키보드 펌웨어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2026년 기계식 키보드 시장에서 가장 조용하면서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Keychron이 차세대 Q Ultra 시리즈 전체를 QMK가 아닌 ZMK 펌웨어로 출시하면서, 수년간 커스텀 키보드 씬의 표준이었던 QMK 중심 생태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한 펌웨어 교체가 아닙니다. 유선에서 무선으로, GPL에서 MIT로, 그리고 커뮤니티 프로젝트에서 상업적 인프라로 — 기계식 키보드의 소프트웨어 기반 자체가 재편되고 있습니다.
QMK는 어떻게 표준이 되었나
QMK(Quantum Mechanical Keyboard)는 2015년 TMK 펌웨어에서 포크된 이후, 사실상 커스텀 기계식 키보드의 공용어가 되었습니다. VIA와 VIAL 같은 실시간 키맵 에디터와 결합하면서 "QMK/VIA 호환"이라는 문구는 곧 키보드의 커스터마이징 능력을 보증하는 인증 마크처럼 기능해왔습니다.
QMK의 강점은 명확합니다. 8비트 AVR부터 32비트 ARM까지 폭넓은 MCU를 지원하고, 레이어, 매크로, 탭댄스, 콤보 등 거의 모든 입력 시나리오를 다룰 수 있으며, 오랜 시간 축적된 방대한 문서와 커뮤니티 지식이 있습니다. Keychron, KBDfans, Drop 등 대부분의 주요 제조사가 QMK를 기본 펌웨어로 채택해왔고, GitHub에 포크된 Keychron의 QMK 레포지토리만 해도 43,000개가 넘는 스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QMK에는 태생적 한계가 있습니다. 유선 키보드를 위해 설계된 아키텍처라는 점입니다. 블루투스 지원은 실험적(experimental) 단계에 머물러 있고, GPL 라이선스는 독점 무선 드라이버의 통합을 구조적으로 어렵게 만듭니다. 무선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이 한계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ZMK — 무선을 위해 처음부터 다시 설계된 펌웨어
ZMK(Zephyr Mechanical Keyboard)는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답으로 등장했습니다. 창시자 Pete Johanson은 20년 넘게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커스텀 무선 키보드를 위한 제대로 된 오픈소스 펌웨어가 없다는 사실에 직접 개발에 나섰습니다. 2020년경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래, ZMK는 커스텀 무선 키보드 씬의 핵심 인프라로 자리잡았습니다.
ZMK의 기술적 차별점은 기반 운영체제에서 시작됩니다. Zephyr RTOS(Real Time Operating System) 위에 구축되어 있어, Zephyr 프로젝트 자체의 BLE(Bluetooth Low Energy) 스택 개발과 버그 수정의 혜택을 직접 받습니다. 키보드 펌웨어 개발자가 블루투스 프로토콜까지 직접 구현하고 유지보수해야 하는 QMK와는 구조적으로 다른 접근입니다.
전력 관리 역시 설계 단계에서부터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ZMK는 세 단계의 저전력 모드를 제공합니다. 30초 비활성 후 디스플레이와 LED를 끄면서도 블루투스 연결은 유지하는 Idle 상태, 블루투스까지 끊고 RAM을 비우는 Deep Sleep, 그리고 물리적 스위치 없이 키 조합으로 완전 종료하는 Soft Off까지. VCC 차단을 통해 RGB LED나 OLED 같은 외부 주변기기의 대기 전력까지 관리합니다.
라이선스도 중요한 차이입니다. QMK가 GPL을 사용하는 반면, ZMK는 MIT 라이선스를 채택했습니다. GPL은 파생 작업물에도 같은 라이선스를 요구하기 때문에, Nordic Semiconductor의 독점 BLE 드라이버 같은 것을 통합하기가 법적으로 복잡합니다. MIT 라이선스는 이런 제약이 없어, 제조사가 상용 무선 솔루션을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법률 문제가 아니라, 제조사 채택의 실질적 장벽을 낮추는 핵심 요인입니다.
숫자로 보는 차이 — 배터리 660시간의 비밀
ZMK의 전력 효율이 얼마나 극적인지는 Keychron의 제품 라인업 비교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QMK 기반의 Keychron Q1 Max는 4,000mAh 배터리를 탑재하고도 백라이트 끈 상태에서 약 100시간의 사용 시간을 제공합니다. 반면 ZMK 기반의 Q1 Ultra 8K는 비슷한 용량의 배터리로 최대 660시간을 달성합니다. 약 6.6배의 차이입니다.
더 극단적인 사례도 있습니다. CannonKeys의 BakenekoGO는 불과 200mAh 배터리로 800시간 이상의 사용 시간을 자랑합니다. QMK 기반이었다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수치입니다.
이런 차이가 가능한 이유는 ZMK가 Nordic nRF52840이나 Raspberry Pi RP2040 같은 최신 저전력 32비트 프로세서에 최적화되어 있고, Zephyr RTOS의 전력 관리 인프라를 그대로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QMK는 원래 ATmega32U4 같은 8비트 AVR 칩을 위해 만들어졌고, ARM 지원이 추가되었지만 전력 관리 아키텍처는 유선 시절의 설계를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Keychron Q Ultra 시리즈의 또 다른 핵심은 8,000Hz 폴링레이트를 무선(2.4GHz) 모드에서 구현했다는 점입니다. 유선에서나 가능하던 초고속 응답성을 무선에서도 실현하면서 배터리까지 장시간 유지하는 것은, ZMK + Zephyr 조합이 아니었다면 현실적으로 어려운 성취입니다.
사용성의 간극 — ZMK Studio라는 과제
ZMK의 약점은 분명합니다. QMK 생태계의 VIA처럼 "앱을 열고 키를 클릭해서 바꾸는" 수준의 실시간 키맵 에디터가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ZMK의 키맵 설정은 기본적으로 devicetree 문법의 .keymap 파일을 수정하고, GitHub Actions를 통해 펌웨어를 빌드한 뒤, 결과물을 키보드에 플래싱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프로그래밍 경험이 있는 사용자에게는 나쁘지 않지만, VIA의 직관성에 익숙한 일반 사용자에게는 진입 장벽이 높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ZMK Studio입니다. USB나 BLE를 통해 펌웨어를 다시 플래싱하지 않고도 키맵을 실시간으로 변경할 수 있는 런타임 편집기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프로젝트의 탄생 배경입니다. CannonKeys가 자사의 무선 키보드 BakenekoGO를 출시하면서, ZMK 창시자 Pete Johanson에게 개발비를 직접 후원하기로 한 것입니다. CannonKeys는 다른 키보드 업체들과 함께 비용을 분담해, Johanson이 다른 직업 없이 ZMK Studio 개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현재 ZMK Studio는 Chrome/Edge 브라우저와 Linux, macOS, Windows 네이티브 앱을 통해 사용할 수 있으며(zmk.studio), 레이어 편집과 키 리맵핑을 지원합니다. 아직 VIA의 완성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Keychron이 자사 Launcher 앱을 통해 ZMK 기반 키보드의 커스터마이징을 지원하면서 사용성 격차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Keychron의 선택이 갖는 의미
Keychron이 Q Ultra 시리즈 전체를 ZMK로 전환한 것은 단순한 기술적 판단이 아닙니다. 기계식 키보드 시장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제조사 중 하나가, 기존 생태계의 표준을 버리고 새로운 플랫폼에 베팅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CES 2026에서 공개된 Q Ultra 라인업(Q1 Ultra, Q3 Ultra, Q6 Ultra)은 모두 ZMK 펌웨어, 8K 폴링레이트, 신규 Silk POM 스위치를 공통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가격은 $229.99~$239.99(약 34만 5천 원~36만 원)입니다. 더 저렴한 V Ultra/Z Ultra 시리즈까지 같은 ZMK 기반으로 확장되면서, Keychron은 사실상 자사의 무선 라인업 전체를 ZMK로 이행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시장에 보내는 신호는 명확합니다. 무선이 기계식 키보드의 기본이 되는 시대에, 유선 중심으로 설계된 QMK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입니다. Keychron은 QMK 기반 유선/유선 우선 키보드도 여전히 판매하고 있지만, 프리미엄 무선 라인의 미래는 ZMK에 걸었습니다.
CannonKeys의 BakenekoGO($80, 약 12만 원)처럼 소규모 커스텀 키보드 업체도 ZMK를 채택하기 시작했고, nice!nano 컨트롤러 기반의 자작 키보드 씬에서는 ZMK가 이미 사실상의 표준입니다. 스플릿 키보드, 로우프로파일 키보드, 트랙볼 통합 키보드 같은 니치 영역에서 ZMK 채택이 가장 활발한 것은, 이런 실험적 폼팩터일수록 무선의 자유가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오해를 피하자면, QMK가 당장 사라질 일은 없습니다. 유선 키보드 시장은 여전히 건재하고, VIA/VIAL의 사용 편의성은 ZMK Studio가 따라잡아야 할 목표입니다. QMK의 기능 목록 — Tap Dance, Auto Shift, Key Override, Secure, Caps Word 등 — 은 ZMK보다 훨씬 풍부합니다. 커뮤니티의 지식 축적량에서도 QMK는 압도적입니다. 유선 키보드를 만든다면 QMK를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흐름은 분명합니다. 소비자 시장에서 무선은 이미 선택이 아니라 기본입니다. 게이밍 키보드 시장에서도 2.4GHz 무선이 유선의 대안으로 자리잡았고, Keychron Q Ultra 시리즈가 증명했듯 8K 폴링레이트에서도 무선은 유선과 구별할 수 없는 응답성을 제공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무선 지원이 실험적"인 펌웨어가 장기적으로 주류를 유지하기는 어렵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두 펌웨어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QMK는 최근 info.json 기반 설정으로 이행하면서 설정 구조를 현대화하고 있고, 강제 오픈소스화를 통해 독점 QMK 포크를 사용하던 제조사들(예: NuPhy)의 소스 공개를 이끌어낸 바 있습니다. ZMK는 ZMK Studio와 서드파티 모듈 시스템을 통해 사용 편의성과 확장성을 빠르게 보강하고 있습니다. 당분간은 "유선은 QMK, 무선은 ZMK"라는 공존 구도가 이어지겠지만, 무선이 주류가 되는 속도에 따라 이 균형은 점차 ZMK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전환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기술적 스펙이 아니라 생태계의 지속가능성 문제일 수 있습니다.
QMK는 거대한 커뮤니티 기여자 네트워크 위에 세워졌지만, 유지보수의 부담은 소수의 핵심 기여자에게 집중됩니다. ZMK 역시 사실상 Pete Johanson 한 사람의 프로젝트에서 출발했습니다. 그가 GitHub 스폰서 페이지에서 밝혔듯, 목표는 "다른 풀타임 직업을 갖지 않고도 가족을 부양하면서 ZMK 개발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CannonKeys의 후원 모델은 이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법을 보여줍니다. 키보드 업체들이 자신들이 의존하는 오픈소스 프로젝트에 직접 개발비를 지원하는 구조입니다. Keychron이 ZMK를 대규모로 채택한 것 역시 프로젝트에 간접적인 경제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제조사의 상업적 성공이 오픈소스 인프라의 지속가능성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가, 앞으로 이 생태계의 건강을 결정할 핵심 변수입니다.
Keychron은 최근 83개 모델의 하드웨어 설계 파일(CAD)까지 GitHub에 공개하면서, 소프트웨어(QMK/ZMK 펌웨어)와 하드웨어(설계 도면) 양쪽에서 개방 전략을 펼치고 있습니다. 물론 이 하드웨어 파일은 "오픈소스"가 아닌 "소스 공개(source-available)"로, 상업적 복제는 금지하되 개인 모딩과 액세서리 제작은 허용하는 구조입니다. 소프트웨어의 MIT/GPL 라이선스와 하드웨어의 제한적 공개 사이에서 제조사가 어떤 균형을 잡아가는지도 흥미로운 관찰 포인트입니다.
기계식 키보드의 펌웨어 전환은 화려한 뉴스가 되기 어려운 주제입니다. 새로운 스위치나 키캡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직접 타이핑해봐도 차이를 체감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키보드를 단순한 입력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플랫폼으로 본다면, 그 플랫폼의 운영체제가 바뀌고 있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QMK가 기계식 키보드 씬에 가져온 혁신 — 누구나 자신의 키맵을 만들고, 펌웨어를 수정하고, 커뮤니티와 공유할 수 있다는 가능성 — 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ZMK는 그 정신을 무선 시대에 맞게 재구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재구현"이라는 말이 품고 있는 무게는 가볍지 않습니다. 새로운 기반 위에 새로운 생태계를 세우는 일이니까요.
다음에 무선 기계식 키보드를 고를 때, 스위치와 키캡만큼이나 "이 키보드는 어떤 펌웨어를 쓰는가"를 확인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 한 줄의 스펙이, 키보드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조용한 혁명의 흔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