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사용기라고 쓰기 어려워 구입기라고 제목으로 후기를 적어봅니다. 서두부터 명확히 하자면 이 키보드는 제 개인에게 있어서 실용의 영역과 100만 광년 정도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노트북들을 주기기로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놈코어, 힙스터, 인디 등의 트렌디한 유행과는 동 떨어진 구닥다리 키보드를 연결해 사용하는 성향은 불편을 감수하는 작은 크기의 키보드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G84-4100이 제게 주는 가장 큰 의미는 통과 의례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세상 쓸모 없기로는 최고 중 하나인 흔한 인터넷 자동차 매거진의 X맛 나는 보그체 감상기와 하등 다를바 없는 궤에 있습니다. 이점 부디 너그러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 왜 G84-4100이어야 하나?

작은 키보드들은 세상에 무수하게 많습니다. 근래에는 Apple Wireless를 기폭제 삼아 수많은 블루투스 키보드들이 쏟아져 나왔으니 더욱 새삼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G84-4100은 그러한 여러 키보드들 중에도 독특한 이면이 있습니다. 단지 작은 키보드 이지만 키패드를 제외한 대부분의 키를 가지고 있다는 겉모습의 특이함과 작고 얇은 표면 아래 기계식 스위치를 탑재하고 있다는 것 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오래된 감성', 다시 말해 향수를 느끼게 합니다. 정확히는 경험해본 적이 없는 시절에 대한 몽환적인 대체 체험으로 사용자를 유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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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시절부터 PC를 다룬 이라 하더라도 경험해보는 것이라곤 삼성 브랜드로 붙이고 출시된 NEC의 몇, 서버나 웍스테이션 브랜드들의 번들, 어처구니 없는 PS/55와 에이서, Cordata나 eMachines 등의 미국 제품의 한국 출시형, 초기 전자상가를 휩쓸던 세진과 아론, 선택 여지 없었던 맥 등이 연상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가끔 미국 생활 좀 한 삼촌을 둔 친구 집에서 만나볼 수 있었던 싸구려 Everex 정도가 조금 더 들어간 정도랄까요. 결국 올리베티, 돌체, 모델M 심지어 체리도 마치 과거에 경험한 듯 각인되어 있지만 사실 그들은 일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 정확히는 교보 문고 수입 잡지 코너에서 살 수 있었던 PC Magazine이나 Computer Shopper 에서나 존재했었습니다. 따라서 '아재의 고집' 따위를 거짓 없이 진술하면 치클릿 키보드로 변한 씽크패드에 분노하며 X220을 놓지 못하는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실제와 몽환의 경계에서 가지고만 있어도 허한 기분을 채워줄 듯한 소품으로 G84-4100은 최적입니다. 충분히 빈티지하지만 그만큼 현실적입니다. '난 고집이 있다'라고 하기에 이 정도 적절한 크기와 가격의 소품은 찾기 힘든데다 심지어 실용성을 노려볼 수도 있으니까요.


- ebay 여정, $50 이하에서 노려본다.

G84-4100의 특별함 때문인지 ebay에는 각종 유형의 제품들이 존재합니다. 일단 탐색을 시작하면 당연하게 구매자는 어떤 제품을 목표로 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 수순이 됩니다. 판매자 주문이나 OEM 공급에 따라 가변이 있습니다만  G84-4100은 크게 1) 윈키리스 + 염료승화키캡 + PS/2 패턴, 2) 윈키 + 레이저각인키캡 + USB & PS/2, 3) 윈키리스 + 레이저각인키캡 + USB & PS/2 겸용 들의 계열로 나뉘어집니다. - 자세한 사양은 체리 사이트 http://cherryamericas.com/product/g84-4100-miniature-keyboard-2/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이런 유형을 살펴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야 하지만 ebay라는 특수성은 구할 수 있는 것과 원하는 것과의 간극을 만듭니다. 즉 ebay는 제품 유형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고 가격과 상태로 대략 아래와 같이 분류됩니다.

유형-1 - $20~30 이하로 형성된 쓸 만큼 실 컷 쓴 제품을 미사어구로 판매하는 중고
유형 2 - $70 이상 심지어 $100에 가까운 가격의 신품
유형 3 -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10개, 20개씩 묵어서 개당 $20 미만으로 처분하는 대량 중고
유형 4 - 윈키리스, AT 컨넥터, 독일산 등으로 레어함을 강조하며 $100 정도 즉구가의 아리송한 무엇
유형 5 - $20~$50 사이의 어딘가 구석에 있다 꺼내서 처분하는 오래된 미개봉 신품이나 오픈박스

당연 손 쉽고 가볍게 취향 따라 구매하기 좋은 것은 유형 2이지만 이 쯤되면 실용성이 고려된 것이지 소품의 영역은 아닙니다. 따라서 실용을 목적으로 하다가도 여차하면 작은 키와 배열에 좌절하고 소품으로 삼기 좋은 최적은 유형 5라 하겠습니다. 이번에 구입한 제품은 $25의 창고에 묵혀있던 미개봉 신품으로 윈키 + 레이저각인키캡 + USB & PS/2 겸용의 G84-4100LCMUS-0 입니다.


- 오래된 박스도 봉인 테이프 커팅의 설레임은 그대로

오래되어 찌그러진 박스이지만 테이핑을 자르는 기분은 역시 짜릿합니다. 그리고 들어난 모양새는 깨끗하군요. 그리고 기대하던 촌스러움이 느껴져 만족스럽습니다. 모드키 이색의 염료승화키캡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윈키를 얻었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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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형 살펴보기

체리 ML 스위치의 앙증스러움은 일면 후발 클론 스위치 제조사들이 시도하는 로우프로파일 스위치들이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체리가 마음 먹고 ML 스위치의 표준 배열 87, 104 등을 출시하면 그만 아닌가 싶은 것이지요. 물론 내구성 한계가 명확하고(ML은 2천만번 작동 사양) 클론 축들이 LED 등으로 무장한데다 체리 역시 그 길을 가려는 듯 하니 스치는 망상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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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캡의 인쇄 상태는 매우 깔끔하지만 후면 절단면이 꽤 거칩니다. 전면부에서는 잘 보이지 마치 부엌 가위로 잘라낸 플라모델을 볼 때의 암담함과 다름아닌 느낌입니다. 앞에는 깨끗하고 보기 좋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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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에서 만들었으며 의외로 엄청나게 나이를 먹은 녀석은 아닙니다. W38이니 2010년 38주차, 체코는 10월 부터 겨울로 들어가는 길목인 늦가을 이라니 완연한 가을 공기 속에서 탄생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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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트는 간단하면서 실용적으로 미끄럼 방지 고무를 꼼꼼하게 붙여두었습니다. 빈티지의 상징인 꼬인줄이 아닌게 아쉽습니다만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일자형 줄이 더 편리할 수 있겠고 케이블 두께가 '나 보기보다 구식이야'라고 말하는 듯 해서 조금은 위로가 됩니다. 오랜만에 보는 PS/2 변환 젠더도 예전 생각나게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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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걱거림 + 키압 + 도각거림 = 매력적, 그러나 손에 맞아야...

오래 묵혀둔 녀석이니 만큼 윤활은 거의 없는 듯이 느껴지는 서걱거림이 있습니다. 키압도 ML을 우습게 보던 사용자를 비웃는 듯 높게 느껴집니다. 더군다나 스토로크가 깊지 않으니 '이 쯤이면 눌렸어~' 할 때 이미 스위치는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반발력에 있어서는 또 키압과는 반대로 튀어나오려고 하기 보다는 자연스럽습니다. 사용하기 전에 대략 찰지다는 평이 지배적인 시저 스위치(펜타그래프) 치고는 키압이 높은 G230 G85-2300을 연상 했었습니다만 실제 체감은 적축과 흑축 사이의 키압으로 눌리지만 바닥을 치는 스위치의 도각거림이 꽤나 맛깔나게 느껴집니다. 넌클릭 스위치라고 하지만 이 도각거림의 느낌이 스위치의 구분감을 압도해 스위치 고유의 구분감은 주가 아닌 부차의 문제가 되어버립니다. 한마디로 꽤나 매력적입니다. ML 스위치로 TKL를 내면 구매 리스트에 넣고 싶을 정도군요. 특히 토프레나 갈축을 선호하는 이들이 매우 만족할 만한 오피스 지향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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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단점 역시도 명확합니다. 말해야 입 아픈 배열은 역시 제게 있어 실용의 영역에서 완벽한 낙제점을 주게 합니다. 우측 쉬프트 사용 빈도가 높고 물음표, 쿼테이션, 역슬래쉬 등의 사용 빈도가 매우 높은 직군에 있기 때문에 배열은 극단적으로 생산성을 하락시킵니다. 여기에 더해 기존의 MX 스위치나 토프레를 사용하는 감각으로 타이핑 하다보면 어느 순간 손 끝이 피곤해져 옵니다. 슬림 타입 치고는 꽤 괜찮은 스트로크 임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좋은데 지치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찰진 맛에 카일이나 오테뮤 등의 클론 청축을 사용하다가 장기간 타이핑하고 나면 체리 청축으로 회귀하는 기분과 비슷합니다. 이런 면에서는 앞서의 호감과는 반대로 리니어에 익숙한 이들에게 더 최적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합니다. 윤활과 조금은 더 구름 타 듯 타이핑하면 좋아질 듯 합니다만... 이쯤 되면 주객전도가 될 듯해 참기로 하겠습니다.


- 결론

이 사진 한장이 말하는 것이 결론이 되겠군요. 오래된 씽크패드와도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소품 정도의 가치 뿐이라도 G84-4100은 제게 충분한 기쁨을 줍니다. 그게 설사 경험하지 못한 주입된 기억과 향수에 대한 얄팍한 기만 가득한 만족감이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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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 언급하였다시피 보그 X맛체를 연상시키는 이 정도 부족한 구입기에서 점수를 논함은 어불성설이나 규정이 규정이니 만큼 주관적이다 못해 무책임한 점수를 부여해봅니다. 실용의 관점을 버리면 100, 실용을 더하면 60, 평균내어 80을 점수을 입력하며 마무리 합니다.

'마음이 허할 때 5만원 쯤의 사치는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요?'